[위치성의 탈피]《호모 스피리투스》에 대한 단상

 

1. 외부는 유발 요인이 되나, 결국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질(친밀성, 사랑)에 달려 있다.

2. 의식이 진화하면 실행의 배후에 있는 사적인 '나'의 환상성이 사라진다. 이때 활동은 자율적이고 수월한 것으로 경험된다. 

3. 업은 존재(Self)가 갖는 부분적 위치성으로서 존재를 통해 우주가 구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4. 모든 중독의 매커니즘의 배후엔 참나(Self)가 있다. 중독이 주는 기쁨은 현상계에서 참나와의 장애를 잠시 걷어내 주는 듯한 환상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만족일 뿐, 공허로 이어진다. 중독의 매커니즘을 예방하는 길은 그것에 대한 중요도를 낮추고, 대안 행동을 찾는 것이다. 

5. 에고는 흥이 나야 일을 한다. 자신의 욕망을 추동력 삼아 공생의 방향으로 쓸 때 순환된다. 벌이 꿀을 찾아 가는 것은 벌의 에고적 이득이지만, 궁극적으로 꽃의 수분을 돕듯이.

 

6.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강하다. 생명의 자연 발생성은 수월하게 상호 작용하는 본질들의 표현이므로.

7. 영적 결함이나 장애는 그것의 초월로 가는 도약대일 수 있다.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8. 타마스적 차원에 있는 사람은 입을 스웨터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더럽고 구멍 투성이다. (이때는 주입식 교육이나 동기 부여도 큰 도움이 된다). 라자스 수준으로 넘어가면 스웨터는 새것이고, 산뜻하고, 깨끗하며 색색으로 구비되어 있다. 삶은 자기 통제 하에 있지만 그 통제감이 상실되면 괴로워한다. 사트바로 넘어가면 더 이상 어떤 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으며 목표는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것으로 되어 간다. 사트바에서도 좋아하는 스웨터를 소유하고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목표는 아니다.

(미디어의 효과는 그것이 타마스에 있는 사람들에게 욕망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타마스에서 라자스로, 매 수준마다 고유한 목적, 유용성 가치가 있다. 그래서 맥락적 차원에서 볼 때 매 수준을 시비 분별 없이 연민을 가지고 관찰할 수 있다.)

9. "내가 ~만 아니면 ~할 수도 있었다."는 가설은 얼마나 많은 피로를 유발하는가. 개인과 사회의 히스테리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대중이 언론 매체의 균형을 잃은 정보를 접하면 암시에 걸리기 쉽고, 두려움에 쉽게 프로그래밍 된다.  

10.  '높은 에너지'를 선택하기 위해 '낮은 에너지'와 싸울 필요는 없으며 사랑의 정합 파동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게 낫다. 투쟁 역시 그 과정은 참자기(Self)와 함께 흘러가야 한다. 그래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에고적 투쟁이나 요구는 모함에 사로잡히기 쉽기 때문이다.


11. '크다'는 '작다'와 대립하지 않는다. 점진적 척도상의 위치를 나타낼 뿐이다. 이원성을 낳는 지각적 오류를 해체할 수 있는 기본 원리를 체득해야 한다. 실상은 대립쌍이 없다. 위치성들은 에고의 임의적 정신 작용에 불과할 뿐이다. 햇볕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빛은 색 스펙트럼으로 분해된다. 적외선이 자외선과 대립한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다.

12. 에고의 투자, 무수한 위치성, 그릇된 동일시로 에고의 두려움은 끝이 없으며 계속해서 증식된다. 이러한 두려움이 잦아드는 것은 오직 '나'의 위치성과 동일시하는 것을 철회할 때, 그리고 자신의 생명과 생존을 참자기(Self)에 내어맡김으로서 자유할 수 있다. 

13. 죽음이야말로 자기 본원적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다.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다. 남들 눈에 시시해도 괜찮다. 정해진 수명이 다할 때 저 높은 질서 앞에 그동안 애썼다, 잘했다. 이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14. 죽음의 정확한 때는 태어날 때 이미 정해졌다. 우주에서는 어떤 '우연한 일'도 가능하지 않다.

15. 에고는 참나의 보살핌 속에 구현되고 있는 가운데 성공을 거머쥐기도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을 각성하지 못하고 그 공로를 가로챈다. 그리하여 성공한 뒤에 무너진다.

16. 생명 자체는 형태 변화를 겪을 뿐 중단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의 근원을 잃어버릴 수 없다. 참나는 에고를 결코 죽을 방향으로 내몰지 않는다. 참나는 손주가 우비 입는 것이나 집세 송금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돌봐 주는 내면의 할머니와 같다. 죄책감을 유발하는 것은 에고다. 에고의 두려움은 상상에서 비롯된다. 본질적 에너지는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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